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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성별을 따지는 아이
  | Name : 이보연  | Date : am.3.5-10:40
웅진씽크빅 - 엄마는 생각쟁이 2010년 3월호에 실린 기고문입니다. 이 글은 원본글이기때문에 잡지에 실린 글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성별을 따지는 아이

                                      이 보연(이보연 아동가족상담센터)

5살 윤미는 ‘분홍공주’입니다. 머리핀에서 신발에 이르기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홍색으로 온통 치장을 하였습니다. 동화책에서 주워들은 ‘드레스’라는 단어를 매우 사랑하여 옷을 사러 갈때도 치마만 보면 “엄마, 이거 드레스야?”라고 물어봅니다. 드레스가 아닌 것은 입지 않는데, 그건 공주들은 드레스만 입기 때문이랍니다. 그런 윤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엄마는 짜증이 솟구칩니다.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드레스 타령을 하는 것이며, 사법고시, 행정고시 수석을 여자가 차지하고 육해공군 사관학교에서도 여생도의 위상을 떨치는 마당에 윤미는 왕자님만을 기다리는 공주에 빠져있으니 아무리 어린 딸이라 해도 실망스럽고 한심스럽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슈렉의 피오나 공주도 보여주고, 용감한 공주가 왕자를 구하는 동화책을 읽어주면 그 때는 재밌다고 깔깔대기도 하고 신나하기도 하지만 윤미의 마음 속엔 여전히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그리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예쁘고 상냥하나 의존적이기만 한 공주만이 ‘진짜’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짜 공주’가 되고 싶은 윤미는 바지를 입으라면 온갖 짜증을 내고, 엄마가 세련된 검정 구두를 고르면 입이 삐죽 나와 ‘남자같다’며 거부합니다. 이러다보니 체육복을 입고 어린이집을 가야할 때도 체육복 츄리닝 위에 치마를 입고, 분홍구두를 신고가는 촌스럽고 기괴한 차림을 합니다. 치마와 분홍색을 고집하고, 아직도 공주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윤미를 볼 때마다 이러다 아이가 나약하고 의존적인 여자로 자라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벌써부터 윤미엄마는 걱정입니다.

민규 엄마도 비슷한 고민을 합니다. 6살 사내아이인 민규는 분홍색만 보면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악!”소리를 지르고 저만큼 내달립니다. 분홍, 빨강, 노랑처럼 예쁘고 밝은 색깔은 ‘여자아이들 색깔’이라고 일찌감치 규정지어버린 민규는 이런 색들이 자신의 물건에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완강히 거부합니다. 마치 그러한 색들이 자신의 남성을 파괴하기라도 할 듯이 대합니다. 4살무렵부터 총과 칼에 매료되더니 지금은 ‘파워레인저’의 매니아가 되어버렸습니다. 눈만 뜨면 소파를 뛰어다니며 ‘파워레인저 엔진포스’를 외쳐대니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두 살 터울인 여동생이 자신의 장난감을 만지기라도 하면 눈을 흘기며 “여자가..”라고 말할 때는 고리타분한 유생의 완고함마저 느껴집니다. 민규엄마는 이러한 민규의 행동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들이라고 특별히 떠받들어 키우지도 않았고,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교육은 단 한차례도 해본 적이 없으며, 남자들의 공격성이 싫어 어릴 때부터 책도 많이 읽어주고 소꿉놀이도 많이 했는데, 아이는 왜 이리 싸움놀이에만 매달리고, 툭하면 “남자니까, 여자가...”식의 성차별적인 말을 많이 하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시대가 많이 변했긴 했나봅니다. 예전엔 여자아이가 선머슴처럼 굴면 핀잔을 하고, 남자아이가 수줍음과 겁이 많으면 혀를 쯧쯧차며 염려하곤 하였는데, 이젠 너무 여자아이처럼, 너무 사내처럼 군다고 걱정을 하는 시대가 됐으니 말입니다. 80년대만해도 여성의 인권을 부르짖는 여성학이며 여성운동이 많은 남성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이루어졌었으나, 지금은 공중파 개그 프로그램에서조차 ‘남성들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성의 역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도적이고 성취지향적인 딸들의 승승장구가 ‘파워걸’, 알파걸‘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것에 비해 아들은 ’꽃미남‘, 펫’이라는 다소 굴욕적이기까지한 말을 듣고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여자아이들은 점점 더 강해지고, 남자아이들은 점점 더 부드러워지는 세상이 되었고, 부모들도 자연스럽게, 당찬 딸과 부드럽고 배려심 깊은 아들을 자연스러운 성역할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과 성역할에 대한 전형화, 즉, ‘성에 따라 특정의 역할과 가치관을 부여하고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딸들에게도 전통적으로 아들에게 기대해왔던 자기 주장과 진취성을 기대하고, 과거 딸들의 미덕이었던 친절함과 배려를 아들에게도 기대하고 가르치는 것은 ’성역할에 있어서 도식이 없는 아이‘들로 기르자는 현대의 교육방침에도 부합되는 것으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가 지나쳐 딸에게 과거 아들에게 기대했던 것들을 요구하고, 반대로 아들이 갖는 남성성을 비난하고 억압시키고자 들면 이때는 또 다른 성역할 전형화를 강요하는 일이 되므로 옳지 않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발달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내는 성과 성역할에 대한 발달 과정을 무시한 채 부모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성역할 개념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왜곡된 성역할 발달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위험합니다.

과거에 비해서 남녀간의 성차가 많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남녀간에는 신체적, 심리적인 성차가 존재합니다. ‘성’은 아이들에게 있어 서로를 구별하게 해주는 가장 분명한 생물학적 특성이므로, 세상을 탐색하기 시작하는 어린 아이들에겐 ‘성별’과 남녀간의 신체적 차이는 매우 강력한 호기심의 대상이 됩니다. 두돌배기 아이들은 남녀의 성기가 다르다는 사실에 부쩍 관심을 나타내며, 만 세 살이 되면 텔레비전이나 동화책, 그리고 일상생활을 통해 보여지는 성역할의 차이를 관찰하고 자신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초등학교로 넘어갈 때까지 아이들은 다소 완고할 정도로 여자와 남자의 성별을 따지며, 고집 센 성차별주의자가 됩니다. 특히, 이 시기 아이들의 인지적 특성상 눈에 보여지는 두드러지고 외현적인 특성에 사로잡혀 겉으로 나타나는 남녀의 특성, 즉 머리모양, 바지, 치마, 옷 색깔 등등으로 명확한 이분법적인 성 구분을 철저히 지키게 됩니다.  여자아이는 자신이 여자임을 확고히 하기 위해 분홍드레스에 집착하게 되며, 남자아이는 빨간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신이 여자가 됨을 의미하기 때문에 엄마가 사준 예쁜 빨강 바지 앞에서 떼를 부리는 것입니다. 만 6세가 될 때까지 아이들은 성의 항상성과 안정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잘못하면 여자가 남자로, 혹은 남자가 여자로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시기까지 아이들은 자신의 성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성별을 따지고, 자신의 성에 맞는 외모와 행동에 집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이들이 성별을 따지는 행동은 성역할 발달 과정상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의 이러한 행동을 지나치게 염려해 야단을 친다거나, 분홍드레스를 원하는 여자아이에게 일부러 파란 바지를 사주고 소꿉놀이를 모두 치워버린다거나 파워레인저를 좋아하는 남자아이에게 ‘넌 너무 야만적이다. 그런 건 나쁜 거다’는 식으로 비난하게 되면 아이들은 오히려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게 될 수도 있으므로 좋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아이들은 지나칠 정도로 성별을 따지기도 합니다. 타고난 남성성과 여성성이 높을 경우에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물학적 특성과 더불어 아이가 접하는 환경적인 요인이 고정적인 성역할을 부추길 때도 이러한 일은 일어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기능적으로는 양성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아이들을 치장시킬 때는 남자아이는 터프하게, 여자아이는 공주처럼 꾸며주는 것도 아이들이 외현적인 성특성에 몰두하게 만들며, 텔레비전만 틀면 나오는 섹시한 옷차림의 여가수들이나 ‘몸짱’을 외치며 울퉁불퉁한 근육을 드러내는 남자배우들의 모습, 그리고 여전히 아이들의 영원한 고전인 공주 시리즈의 동화들은 아이들에게 ‘남자란, 여자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강한 인상을 남겨줍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고정적인 성역할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만일 아이가 텔레비전을 지나치게 많이 볼 때에는 성별을 따지며 이분법적인 성적 구분에 몰두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이런 경우 텔레비전 시청을 줄이고, 부모님이 평소에 평등하고 다정한 부부관계를 보여주며, 아이들과도 성역할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놀이경험을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앞으로 많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세상은 여자와 남자로 이루어져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적 차이가 확연한 만큼 심리적인 차이도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남녀의 차이는 우월과 열등의 차이가 아니라 그저 다름일 뿐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해주면서 딸과 아들이 아닌 한 아이의 특성을 존중해주는 것, ‘여자니까, 남자니까 이래야 한다’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의 성장을 격려해 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21세기의 성역할 교육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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