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발달    

 

 

 

아동기 심리(정신)장애

 

ADHD

 

만화로보는 ADHD

 

아스퍼거 증후군

 

자폐증

 

학습장애

 

이럴땐 어떡하죠?


 

 

 

 

 

이럴땐 어떡하죠?

 

 따돌리는 아이,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


요즘 학교에서 또래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자살까지 하는 아이들의 기사가 심심찮게 나온다. 흔히 이를 왕따, 집단 따돌림, 집단 괴롭힘, 이지메(일본어)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리고 있지만 어느 용어나 '따돌리는 아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선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어떤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를 보고 자신들과 다른 점을 발견하여 그 차이에 꼬리표를 붙여 그 아이(들)를 제거하거나 위해를 가하거나 혹은 착취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항상 문제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각에서 보며 문제가 있는 아이는 '따돌리는 아이들'로 결론이 내려진다. 물론 사회라는 큰 틀에서 특히 법률적 해석을 우선시하는 법치국가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나누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본질적 해결과는 점점 멀어지고 이러한 연결고리를 끊기보다는 점점 더 유행처럼 번지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 문제는 법률적 해석만으로 부족한 점이 많다. 또한 심리적인 용어로 '아동문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따돌리는 아이만 문제가 있는 경우는 극히 적다. 즉,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에게도 정서적, 행동적인 문제 요인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아니 '사회성'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다수'의 틈에 끼지 못하고 혼자서 따돌림을 당하는 '소수'에 속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소수에 속하는 아이들을 보면 우선 자신감이 없는 아이들이 많다. 부모들이라면 누구나 아이가 적극적이고 자신감 있게 크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사소한 것까지 부모의 허락을 구하고, 과제물도 엄마가 일일이 챙겨주어야 하며, 자기 스스로는 아무런 결정을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이런 행동은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 형제, 배우자, 자식에게까지 의존하려는 행동으로 남는다. 이러한 아이들의 배후에는 대부분 뭐든지 알아서 처리해 주는 부모들이 있다. 즉, 아이 스스로 시도할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완성되는 시기를 만 6세부터 12세 사이로 보는데 자신감의 기초가 되는 부분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형성된다. 흔히 만 2세가 되면 아이들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하려고 하는 자율성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한 쪽 가랑이에 양쪽 발을 집어넣으면서도 기어이 혼자서 바지를 입으려고 하며, 숟가락이 코로 향하면서도 혼자서 밥을 먹겠다며 엄마와 실갱이를 벌이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러한 연습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율성을 터득하게 되며 자신감을 갖게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부모들은 이러한 아이들의 자율성을 저지시킨다. 가령 아이는 매우 적극적이고 활발한 아이여서 그대로 놔두면 호기심 많고 자신감 있는 아이로 자랄 수 있는데, 부모가 너무나 엄격하고 예의바른 것을 강조하며 소극적일 경우, 아이의 행동을 통제하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게 된다. 이럴 때, 아이의 타고난 성향과 부모의 양육태도가 맞지 않으면 아이는 좌절경험을 많이 하게 되고, 자신은 부적합한 아이, 항상 잘 못하는 아이로 생각하게 되어 자신감을 상실하게 된다. 또 다른 경우, 부모가 사사건건 참견하며 다 해주면 아이는 '나 혼자서는 할 수 없구나'라고 생각해서 의존적이 되며 자신감을 상실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아이가 무슨 일을 하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도 아이는 '내가 하는 일이 부모에게는 전혀 가치가 없구나'라고 느껴 자신감을 잃게 된다. 부모가 소극적일 때도 아이들은 그러한 태도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부모의 양육태도는 아이의 자신감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게 되어 결국 또래관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감 있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부모들의 태도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지나치게 허용적이거나, 반대로 너무 엄격한 태도 모두 좋지 않으며, 부모는 해야 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 등의 명확한 규칙을 갖고 이 안에서 아이가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또한 부모가 따뜻함과 배려, 수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아이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아이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실패를 했을 때에도 부모는 그 과정에서 아이가 노력한 것, 그리고 아이의 의도를 파악해 격려해 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두 번째로 잘난체하거나 이기적인 아이들을 들 수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 큼 소중하지 않을 자녀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특히 하나 둘만의 자녀를 갖는 요즘은 그 소중함이 더함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혹시 '아이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나 뿐인데 잘 키워야지...' 하는 등의 생각으로 지나친 과보호와 관용을 베풀 게 된다. 아이가 해달라는 것을 거절하지 못하며 또한 아이가 하나나 둘뿐이다 보니까 아이보다도 부모 자신이 아이와 정서적으로 분리되는 데 더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러한 아이들이 성장해 유치원이나 학교에 입학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친구들이 자신의 장난감을 만지면 막무가내로 울어대며, 또 선생님이 자기만 돌봐주기를 원한다. 자녀가 하나뿐이든 열이든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사랑이 지나치다보면 과잉보호나 지나친 허용으로 흘러 아동을 망칠 수 있다. 아이가 한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는 아이에게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예의는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건강한 부모의 역할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부모는 아이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만 3세 정도) 아이를 서서히 정서적으로 분리하는 연습을 하고, 독립적인 자아로서 인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아이가 어렸을 적부터 부모가 기본적인 행동규칙들을 설정해 놓고 일관성있게 이러한 규칙들을 지키도록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이라든가, 타인의 신체적 안전을 위협하는 일(예; 때리기), 물건을 고의로 파괴하는 일 등은 가장 기본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부모들이 아이들의 행동을 통제할 때는 아이들이 울거나 떼를 쓴다고 해서 포기하고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일관성 있게 규칙을 준수토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게다가 아이들의 이타적인 행동을 키우기 위해서는 첫째, 사랑이 넘치고 따뜻한 가정분위기를 조성하고, 둘째, 규칙을 분명히 설명해 주고 이유를 설명하며, 셋 째, 이타적인 행동에 대한 칭찬을 해주며, 넷째, 좋은 행동, 돕는 행동을 하도록 부모 자신이 사려 깊고 관대한 행동모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들의 문제점과 부모들의 역할들을 먼저 제시했는데 그렇다고 따돌리는 아이들이 정당하고 옳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사실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들의 문제를 너무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 강조했을 뿐이지 기본적으로 문제는 따돌리는 아이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따돌리고 때리는 행동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언젠가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에 재미있는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한 자료가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왕따를 시키는 아이들'과 '왕따를 못하게 막는 아이들' 그리고 '왕따를 즐기는 아이들' 을 상대로 각각 부모와 자녀관계에 관한 흥미있는 조사 결과를 실었다. 먼저 '왕따를 시키는 아이' 대부분은 "부모가 싫다"고 대답했다 한다. 반대로 '왕따를 못하게 막는 아이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부모가 좋다"고 대답했다. 게다가 '왕따를 재미있어하는 아이들' 역시 "부모가 싫다"고 대답했다 한다. 즉, 왕따를 중지시키려고 하는 아이는 부모-자녀 관계가 좋다는 의미이고 반대로 왕따를 시키는 아이나 그것을 재미있어하는 아이는 부모-자녀 관계가 좋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왕따를 시키는 아이는 자신의 내적 마음에 있는 분노의 감정을 폭발시키려고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럼 이런 분노의 감정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그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다.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의 기분에 공감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힘이 부족하면 아이들은 불만을 갖는다. 하지만 그 불만을 부모에게 토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싶고, 부모의 보호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의 사랑과 애정을 받기 위해서 아이들은 부모 앞에서 좋은 아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참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인내는 아이들의 마음에 분노를 축척시킬뿐이다. 하지만 역시 그 분노를 부모에게 폭발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아이들은 그 분노를 부모 이외의 인간이나 사회에 폭발시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분노를 폭발하는 상대는 바로 자기보다 약하다고 판단하는 아이들이 선택된다. 그것이 바로 '왕따' 혹은 '집단 괴롭힘'이 되는 것이다. 친구를 괴롭히는 것으로 한순간 분노가 사라지기 때문에 황홀감까지 맛본다고 한다. 하지만 그 황홀감도 극히 짧은 순간의 쾌감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 쾌감을 맛보기 위해 괴롭힘은 계속되는 것이다. 게다가 왕따 당한 아이도 자신보다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 역시 왕따 당한 분노의 감정을 폭발시키려는 수단이다. 이렇게 해서 분노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에게서 아이에게, 그 아이로부터 다른 아이에게, 혹은 손자로까지 전염되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학교뿐이 아니라 분노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에 만연해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분노를 타인에게 폭발시키면 왕따나 따돌림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폭발시키면 비행이나 범죄로 나타나며, 자기 자신에게 폭발시키면 신체질환이나 정신질환으로 나타난다. 대인관계의 마찰의 대부분이 이러한 분노의 감정이 원인이라 생각된다. 회사나 주변 사람들, 친구나 동료들과의 마찰은 대부분 자신의 마음속에 내재된 분노 때문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상대의 마음을 배려하는 안테나가 작동하지 않아 상대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도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리는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의 감정이 무서운 것은 본인 스스로 거의 자각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사람들에게 괜히 시비를 걸거나 타인의 실수를 필요이상으로 비난하거나 익명으로 중상모략하는 사람들 대부분도 이 분노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왕따 문제를 이 사회에서 근절시킨다는 것은 좀처럼 어렵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우선 자기자신에게 그런 왕따와 관련된 분노의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잘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고 따돌리는 아이들의 특성을 개인적인 문제로만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는 부분들이 많다. 따돌리는 아이들의 또다른 심리적 특성을 보면 획일성이다. 자신들과 똑같이 생각해야 되고, 똑같이 행동해야 하는, 즉, 다른 사람과 나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아이들의 개인적 특성이나 성격으로 돌리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제도적 문제다.

우리 사회는 '옳고 그름', '정답과 오답', '선과 악', '좋고 싫음', 등 이분법적 사고가 곳곳에 만연해 있다. 이러한 사회풍조는 우리나라의 '획일성'의 교육에서 기인하는 문제라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사회, 문화적 관습이 타파되지 않는 한, 왕따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획일성이란 간단히 말해서 '차이의 불인정'이다. 나와 조금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과 어울리지 않으려 하고, 조금만 신체적 장애가 있어도 같은 그룹에 끼워주지 않으며, 정답은 하나 이상이 될 수 없는 객관식 시험 등등, 우리들 모두는 이러한 획일성에 길들여져 있다.

이러한 전형적인 예가 글자를 쓸 때 순서다. 딸이 한글공부를 하고 싶다고 해서 며칠 전부터 학습지 선생님이 방문해서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ㅌ'을 쓰는 순서 때문에 딸은 상처를 받았고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건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전에 딸에게 'ㅌ'을 가르치면서 순서를 '-' 'ㄷ' 'ㅌ'으로 가르쳤는데 알고보니 '-' '=' 'ㅌ'이 정답이었다. 따라서 엄마를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믿는 딸은 엄마의 가르침이 맞다며 선생님의 가르침을 거부했고 그런 선생님은 급기야 엄마를 불러 원조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딸에게 엄마의 실수를 설득했고 결국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지만 나는 왠지 씁씁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실, 사회에 나오면 학교에서는 틀렸다고 하는 순서대로 글을 써도 누가 뭐라하는 사람도 없으며 또한 그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물론 어떤 불이익을 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학교 교육에서는 반드시 글자를 쓰는 순서는 하나밖에 없으며 그 순서대로 쓰지 않으면 틀렸다는 각인을 씌워버린다. 우리 아이들은 이러한 훈련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계속 받고 자란다. 이러한 획일성은 자녀양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때리면 안된다'고 하면 '때리는 부모들은 야만인'으로 생각하고, '사랑으로 키워야 된다'고 하면 아이가 잘못해도 꾸짖지도 않는다. 이러한 획일성은 사회, 경제, 정치, 문화 어느곳에서나 마찬가지며 따라서 어느곳에서나 '왕따'가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차이'를 의식하는 것,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에릭슨이 말한 바대로 사춘기 청소년기의 발달과제는 자기 동일성의 확립을 세우는 시기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과의 대립, 자기와 타인의 차이를 의식함으로서 아이들은 자기 동일성을 확립해 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차이를 의식하는 훈련, 자체는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학교교육은 지나치리만큼 차이의 의식화에 편향해 정력을 쏟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다르게 보이는 것도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똑같이 보인다든가, 사물에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라는 교육이 아니라 정확하게 차이를 발견해 조금이라도 정답과 다르면 버리는 교육, 그러한 차이의 적발훈련을 아이들에게 매일 가르치고 있는 교육현장. 그 때문에 아이들은 사람과 사람과의 차이에 대해서 '승부'의 이미지를 갖고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사고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현장이 존재하는 한, 우리 아이들 세계에서 '왕따의 비극'은 계속 될 것이다.


이럴땐어떡하죠?
이럴땐 어떡하죠?

집안에서 야기되는 문제
 

  떼쓰는 아이

  고집세고 말 안듣는 아이

  느려터진 아이

  정리정돈을 못하는 아이

  비디오, TV, 인터넷 게임이 빠진 아이

  신경질적인 아이

  형제간의 싸움

 

학교(유치원), 학습, 친구관련 문제
 

  혼자서만 노는 아이

  때리는 아이, 맞는 아이

  발표력이 떨어지는 아이

  따돌리는 아이,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

  학습이 부진한 아이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아이

  주의집중을 못하고 산만한 아이

  한가지 것에만 몰두하는 아이

 

언어문제
 

  말이 늦는 아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이

  혀짧은 소리를 내는 아이

  말을 더듬는 아이

 

식사와 관련된 문제
 

  먹지 못할 것을 먹는 아이

  자주 토하는 아이

  사춘기 섭식장애

 

신체화 증상
 

  눈을 깜박이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는 아이

  알레르기 반응(심리적인 면)

  과민성 장 증후군

  과호흡 증후군

  머리카락이 빠지는 아이

불안 및 우울과 관련된 문제
 

  손가락을 빨거나 손톱을 물어뜯는 아이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

  매사에 불안해하는 아이

  수줍음이 많은 아이

  집밖에만 나서면 말을 하지 않는 아이

  개만 보면 까무러치는 아이

  의욕과 자신감이 없는 아이

  늘 위축되고 반응이 없는 아이

  9.11 사건 이후 대형건물에 가지 않으려는 아이

 

비행 및 반사회적 행동 문제
 

  물건을 훔치는 아이

  거짓말을 하는 아이

  폭력적인 아이

  반항적인 아이

 

성과 관련된 문제
 

  성기를 만지는 아이

  자위행위를 하는 아이

  여자(남자)하고만 노는 남자(여자)아이

 

배설과 관련된 문제
 

  소변을 자주 보는 아이

  옷에 쉬를 하는 아이

  대변을 옷에 묻히는 아이

 

수면과 관련된 문제
 

  밤에 자다가 자주 깨서 우는 아이

  악몽을 꾸는 아이

  자다가 일어나 소리지르는 아이

  자다가 돌아다니는 아이